비꽃
팬들 눈에 뜨이기는 싫어.
스쳐 지나가듯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엄지손가락을 비스듬히 비껴 베이스 잡지를 한 페이지 넘기며 자쿠로가 조용히 이야기했다. 제가 첫 연인-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연인이라 그녀를 칭하는 일에 그는 퍽 자신이 없었다-일만치 이성과의 교제가 늦은 그녀였기에 영락없이 그것이 결혼 따위 상상해 본 적도 없다는 거절일 줄 알았는데, 뒤잇는 말소리에 마코토는 하마터면 늦은 저녁으로 그녀가 만들어준 참치회덮밥을 먹다 말고 혀를 깨물 뻔 했다.
“그리고 피로연은 생략하는 걸로 하고.”
“…네?”
“옷은 시로무쿠든 드레스든 상관없는데, 고를 때는 너랑 같이 가는 게 좋겠네.”
너라면 괜찮겠지. 이어 그녀는 얼핏 들으면 겉도는 것만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의 금색 눈은 변함없이 시선이 페이지에 고정된 상태였다. 그러나 잡지를 받쳐들지 않은 그녀의 오른손이 주먹을 쥐다 만 부자연스러운 형태를 한 것을 보고 마코토는 가볍게 웃었다. 곧 밥알 한 풀 남지 않은 그릇을 잠깐 싱크대에 올려놓고 마코토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간다. 껴안아도 될까요? 그렇게 말한 다음에야 자쿠로는 눈길을 들어 마코토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먼저 선수를 치듯 그 팔을 살며시 잡아당겨 그 목에 가느다란 팔을 두르고, 마코토의 하얀 뒷목을 어르듯이 손바닥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자쿠로는 마치 오랜 세월 동안 결혼을 10번은 해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다시 말해 따지는 것이 많았다. 생면부지의 타인은 몰라도 그녀의 아버지에게는 이 결혼식을 비밀에 부칠 것, 웨딩드레스는 장갑이 있는 쪽으로 골랐으면 좋겠다는 것. 아이는 낳고 싶지 않고 앞으로도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결코 높진 않을테니 혹시라도 기대는 하지 말라는 것. 어느 쪽이든 마코토의 예상 범주 내였다. 동시에 그가 바라는 바와 취향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마코토는 물이 옷에 튀지 않도록 두꺼운 앞치마를 두르며 고개를 살랑거리듯 끄덕였다.
“그리고 반지는 자수정과 사파이어가 사이좋게 박힌 거면 좋겠지.”
“…반지를 미리 준비하지 않기를 잘했네요.”
“글쎄, 네 취향대로 반지를 골랐어도 괜찮았겠지만 그런 건 공동부담으로 하고 싶고.”
무엇보다 깜짝 선물이란 건 생각 이상으로 별로거든. 결혼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짐짓 다 식어빠진 차를 목구멍으로 훌쩍 넘기듯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한 사람이 저러니 아이러니하지만, 마코토는 고양이가 심심풀이 삼아 가지고 놀다 흩어진 털실처럼 그녀가 쏟아놓는 말들에 실린 분명한 무게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게의 증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표한 수락의 무게를 더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 애정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몸을 물들이듯 마코토가 넌지시 물었다.
“언제쯤이 좋을 것 같은가요?”
“네가 원하는 꽃이 피는 계절쯤이 좋을까.”
“네?”
“…꽃은 네가 마음에 드는 걸로 준비하는 게 어떠냐는 뜻이야. 나 참,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건지, 욕심이 없는 건지. 나는 이렇게 요구사항을 다 말했는데 마코토 너는 입도 벙긋 않네.”
“아, 저도 말해도 되는 거였습니까.”
“왜 없겠어? 하게 되면 너도 주인공일텐데.”
이번에는 무슨 엉뚱한 질문을 하느냐는 듯 자쿠로가 장난스럽게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원하는 거라. 마코토는 혀로 질문을 알사탕을 녹이듯 찬찬히 굴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릇 표면을 만져보니 밥알이 닿은 흔적 특유의 끈적거리는 감촉은 간 곳 없었기에 이쯤 싱크대 수도꼭지를 손등으로 올려 잠그고 그것을 개수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른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그녀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그녀는 이제 잡지를 덮어 유리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한 쪽 팔로 머리를 받친 채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뭘 말하면 되는 걸까요. 사실 누구보다도 결혼이라는 주제에서 따질 문제들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바로 그였을 것이다. 결혼 전과 후의 삶의 커다란 차이점을 찾을 이유를 못 느껴서였을까. 물론 아주 안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침대가 조금 더 넓어질 수 있을 것이고,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벽 한 켠에 걸리며 서로가 점차 머리가 희어지고 주름이 깊어지는 과정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보게 된다는 것 정도로는 아마도. 하지만 당장 다른 것을 떠올리라고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눈 앞에서 자쿠로가 몸의 방향과 눈동자의 각도를 제 쪽으로 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저 자신의 일방적인 마음이라 생각하고 포기하는 것이 옳을 일일지도 모른다며 손을 뻗을 생각도 못 했었는데. 하지만 자쿠로의 질문을 흘려넘길 생각 또한 없었으므로 마코토는 소꿉놀이를 하는 기분이 되어 턱에 손가락을 살며시 올렸다. 그래, 조금 특별하고 재미날 것 같다 싶은 거라면-….
“…신혼여행은 프라하로?”
“아하, 이런. 비행기에 근 한나절에 이르는 시간을 주먹밥처럼 끼여 가게 생겼네.”
“싫으면 다른 곳으로 알아볼까요?”
“딱히 싫다는 건 아닌데.”
*
약혼식과 결혼식의 준비는 선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저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이 적었을 뿐. 하지만 정말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 것은 자쿠로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램페이저 녀석들이랑 에덴의 밴드 동료들에게만 비밀스럽게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물었을 때 마코토는 자신의 가장 가까이에 시간이 이미 맞춰진 시한폭탄처럼 모든 것을 신나서 떠들어댈 준비를 하는 것처럼 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머리를 감싸쥐었지만 자쿠로는 그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내고 싶어하는 눈치였기에 이번에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기실 언제까지고 결혼 사실을 비밀로 묵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저, 그들이 금박을 입힌 청첩장을 띄우는 것보다 혀가 조금 더 조급하게 굴었을 뿐.
아무리 라이브하우스에서 엄격히 반입을 금지하고 있는 안내사항을 차입물품을 넣는 상자 옆에 대문짝만하게 적어도, 슬프게도 눈알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인류가 존재하기는 했다. 거리낌을 모르는 애정이 드러난 문장의 열거가 적힌 종이쪽을 제외하고 난다면, 가장 대표적인 단골 반입금지물품은 두 가지였다. 생화, 그리고 도시락. 기실 꽃의 경우엔 이제 거리마다 봄 특유의 사근거리는 듯한 온풍을 받아 꽃잎을 연 다양한 꽃들이 거리며 장식 화분에 흐드러진 시기였으니 화환을 선물하기에도 좋은 타이밍이지만, 그럼에도 개인 팬으로서 저의 존재를 보다 깊숙하게 각인시키려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매너쯤은 가볍게 즈려 밟을 수 있는 무례한 팬들은 계절을 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결혼 사실을 공표하면 충격과 공포의 게거품을 물 가엾은 이들이기도 했다. 실제로 여기서 가장 가여운 것은, 두 사람의 결혼을 한층 더 고아한 화엽으로 감싸 축복을 해줄 비책을 제시한 것들이 결과적으로 그들 자신이라는 점에 있었다.
“마코토. 그거……. 생화 같아.”
“네, 쿄 씨. 생화가 맞네요. 반입금지 물품에 분명히 마스터가 적어두셨을 텐데.”
모처럼 아발론 산하에 속했던 4밴드와, 오시리스와의 투맨 라이브 단골 파트너인 램페이저까지 함께 하는 초대형 라이브였다. 언더 더 에덴의 개방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차입물품을 두는 상자가 차는 속도 또한 굉장히 빨랐기에 방금 막 첫 번째로 찬 상자가 관계자 출입 구역으로 흘러들어온 참이었다.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레이가 오늘 아침을 거르고 바로 와서 배가 고프다는 둥의 핑계를 대며 겉표면에 고딕체로 OSIRIS라 씌어진 상자를 들고 왔다. 엉망으로 상자를 헤집는다며 마코토는 넥타이를 매다가 말고 또 잔소리를 했지만, 두 사람의 사이를 비집고 쿄가 반짝이는 눈으로 제 앞으로 온 메제드 마스코트 모형을 집는 바람에 한층 누그러졌었다. 나중에는 아예 포기를 하고 마코토도 옷을 다 갈아입은 후에 제 이름이 적힌 상자 하나를 발견해 집어들었다.
마코토는 곤란한 얼굴로 작은 상자 안에 든 꽃다발을 손에 쥐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오시리스의 이미지 컬러를 그대로 본뜬 듯한 코발트 색의 푸름이 가득한 델피늄이었다. 상자 자체가 가볍게 느껴졌고, 특별히 이상한 냄새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도시락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하며 선물을 풀었지만 상자를 열자마자 은은하게 풍기는 화향에 한숨을 푹 쉬었다. 마코토의 선물을 호기심 어린 곁눈질로 흘깃거리고 있던 레이가 킬킬 웃으며 마코토의 정장과 꽃다발을 번갈아보았다.
“푸핫, 마코쨩, 그 차림으로 꽃다발이라니 진짜 어디 장가가는 것 같네.”
“정말 실없는 소리를 하시네요.”
마코토의 옆 소파에는 쿄 또한, 방금 막 라이브 의상으로 옷을 다 갈아입고 앉아있었다. 푸른색으로 테가 반짝이는 수트에 푸른 나비넥타이, 파란 장미-조화였다-로 만든 부토니에를 꽂은 채 메제드 모형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다. 왜, 5월의 신부라는 말도 있잖냐. 비록 진짜 결혼은 할 수 없어도 팬들은 자신이 신부가 된 것 같은 분위기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번 특별 제작 의상의 컨셉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크림슨으로만 탐욕스레 유입되던 자금과 재원, 컨텐츠의 흐름이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하며 동시에 활기를 띤 에덴의 재정은 이제 보다 여유로워졌고, 까닭에 별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저 하필 결혼을 조금씩 준비하는 시기에 이런 이벤트 의상이라니 기분이 묘했는데, 하필 이런 선물을 오늘 같은 라이브 날에 받게 되리라곤. 저를 생각하고 제 손 끝에서 별가루처럼 바스라지는 음악에 매료되는 것에는 분명 감사함을 느낀다. 그러나 감사를 표하는 것과 제가 앞으로 걸어갈 길 옆에 함께 서줄 파트너를 찾는 일이란 다른 것이니까. 그 탓일까, 불현듯 자쿠로가 넌지시 속삭였던 꽃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부케에 쓸 꽃. 부토니에로 쓸 꽃.
푸른 부케를 장갑 낀 손에 쥐여주고 나면 비로소 완성될 그녀와 자신이 그리는 단 한 번의 풍경.
“어머, 또 난처한 선물을 받은 모양이네.”
아무래도 한숨 쉬는 소리에 그녀의 구두소리가 먹힌 듯했다. 마코토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다시금 들었을 땐, 레이와 쿄는 이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파 뒤켠으로 다가선 자쿠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라이브 퍼포먼스 탓에 웨딩드레스처럼 폭이 넓은 드레스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깨와 등이 적당히 드러난 노출과, 군데군데 심홍색 모란꽃 코사지가 박힌 슬림한 검정 드레스는 그녀의 몸에 꼭 어울렸다. 검은 날개처럼 등 아래로 흐드러진, 보다 길이가 긴 치마 뒷자락은 길게 꼬리를 끌고 오래도록 붉은 융단 위에 자욱을 남기는 웨딩드레스 자락을 대신하는 디자인일까. 마코토는 그녀가 한 손에 쥐고 있는 검은 장갑에 잠깐 시선을 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급적이면 오늘 같은 날만큼은 받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죠.”
“어쩔 수 없지. 당분간 너는 오시리스를 그만둘 생각도 없을 거잖아.”
“자쿠로 씨도 마찬가지면서.”
“뭐야, 두 사람. 분위기 오늘 따라 야릇하다?”
레이가 바로 눈을 짓궂게 반쯤 접으며 눈길을 주고받는 둘을 놀렸지만, 이윽고 마코토가 한 손에 그녀의 레이스 장갑을 건네받으며 속삭인 목소리에는 입을 커다랗게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자쿠로 씨. 모란과 델피늄은 마음에 드나요?”
“…으음, 부케로 쓰이는 꽃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오시리스와 램페이저의 이미지 컬러죠. 살짝 짙은 자적색과 푸른색.”
“엥? 너희 잠깐만. …엥? 에에에에엥?”
달그락. 작은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면 쿄가 느릿느릿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메제드 모형을 줍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허둥지둥 움직이는 모양새 같다고 생각하던 마코토는, 이어 탄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새로 드럼을 정비하고 있던 신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곧 제 밴드메이트가 유부남이 될지도 모른다는 지극히 주관적 기준의 비보를 전하는 레이의 요란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그럼에도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손에 장갑 안의 공간이 완벽히 들어맞을 때까지 정중하게 장갑을 끼워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