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엘
들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바람은 작은 몸을 나풀거리며 볼을 스쳐 지나갔다. 이경은 풀이 언덕빼기에 널리 자라 퍼진 언덕 위에서 그를 생각했다. 작은 꽃들이 색색깔로 언덕 가득히 피어있었다. 꽃은 주렴발마냥 제 자리에서 피어났다. 제비꽃은 하늘을 삼킨 듯 푸른 빛을, 흰 은방울꽃은 봄의 신부마냥 새하얀 사포를 드러내며 수놓아져 있으며 가지각색이었다. 말은 날렵하게 몸선을 유선형으로 뻗고는 푸른 잔디에 몸을 모로 기울였다. 이경은 그의 무릎을 목베게 삼아 누워 있었다. 오랜 야근으로 단단해져 아팠던 목근육의 고통이 오늘은 기억나지 않았다. 마음 한켠에 간질간질 꽃이 피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는 시선을 내려 이경의 눈매를 마주 보았다. 이경은 황급히 손을 들어 볼을 차양마냥 손바닥으로 황급히 가렸다. 손바닥으로 볼을 감싸던 손은 문원이 거듭 쳐다보자 어느샌가 얼굴을 이경의 작은 손틈새로 겨우 볼 법하게 가리었다. 이경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뭘, 뭘 지켜보는데요. 그는 볼깨를 보며 웃음을 그었다. 눈은 고이 예쁘게 접히고 웃음은 얼굴 가득히 피어있었다. 이경은 그의 장난끼 섞인 웃음을 좋아했으나 오늘은 논외였다. 이경이 볼에 묻은 작은 마커 자국을 황급히 가린 걸 그가 손가락을 떼어냈다. 고개를 숙이고 잔뜩 놀리는 말을 쏟아냈다. 왜 부끄러워해요. 귀엽기만 한 걸. 그는 손가락을 들어 토끼 수염처럼 모로 가늘게 그은 마커 자국을 쭉 잇듯 손매를 장난스레 움직였다. 이경이 오랜 야근을 하며 꾸벅 졸다 볼에 긋고만 마커가 아직 안 지워지고 있었다. 아이가 장난쳐 놓은 것 같아 귀엽네요. 뭐래요. 장문원씨도 야근 해볼래요? 아뇨, 그건 좀. 저도 야근해요. 볼에 펜이 그어질 일은 없지만요.
태오는 그의 말을 듣고 떠오른 펜과 칼에 대한 생각을 무의식 너머로 익숙히 삼키고 미루어냈다. 웃음을 나누고, 소소한 담소를 농담 삼아 나누는 곳. 평화가 도래하고, 봄볕이 아름답게 내쬐며 꽃바람을 만끽할 적에도 그들은 봄의 날씨가 변덕스럽듯 뒤따르는 먹구름이 그들 뒤를 따라오고 있단 걸 까먹을 수 없었다. 전중이었다. 그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하여 장안성에서 합동 장례식을 치른 시기에서 몇 주 뒤떨어지지 않는 지금이 연무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책사인 이경이 뽑은 날랜 군사는 칼에 명운을 달리하지 않았냐면서. 상사의 명을 받아 그녀가 그은 이름의 명단에 속한 사람은 밀명에 따라 암살당하지 않았냐면서. 그녀가 사무적으로 휘두른 펜촉은 장문원과 그녀와 같이 일상을 마지않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 않았냐면서. 그녀가 웃음을 지으며 보낸 직장 동료는 몇 달 후 이경이 회의를 다녀오고 장안에 복귀하니 아무 소식 없이 사라지지 않았던가. 그만하자. 이경은 숨을 멈추듯 가파르게 차는 생각을 황급히 되돌렸다. 걷잡을 수 없는 생각이 눈덩이마냥 몸을 부풀리고 잔뜩 몸을 단단히 하며 이경을 몰아붙이기 직전 이경은 자신을 되잡으려 노력했다.
그래, 그리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졌다. 자신은 동조자이자 죽음이 자신을 끌고가도 할 말이 없는 자였다. 이경은 죽음을 기억하고 살았고 죽음에 정직했다. 선량한 삶을 산 나를 왜 이르히 죽음을 겪게 하냐며 제 죽음을 억울히 할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경은 자신이 죽음을 맞이함에도 죽을만한 사람이 죽었다고 여겨 제 장례식에서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타인의 목숨을 살생부처럼 내만지며 제멋대로 남의 행복을 앗아간 자에겐 이도 과분한 상식이었다. 죽음이 예고도 없이 방문하는 불청객마냥 몸을 도사리고 있는 곳에서 그들의 봄빛은 시들 듯 말 듯 마른 꽃빛을 띄고 있었다.
장문원은 이경을 놀리며 하하 웃다 볼을 긁적였다. 밑단이 둥글게 말아진 토끼귀가 쫑긋 귓고리를 올렸다. 주의를 환기하거나 중히 할 말이 있을 일에 올라가는 장문원의 토끼귀였다. 이경은 다람쥐마냥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그와 함께 나무에 마주 기대섰다. 짗궂은 장난에 마음을 단단히 먹은 이경은 어깨에 내려온 토끼 귀 모자를 꾹꾹 힘을 주어 연이어 눌러대며 부루퉁거렸다. 참, 그만 놀려요. 그녀 볼에 태양빛의 붉음이 비추어 자연 눈살을 찌푸렸다 부러 불퉁한 채 웃고는 그를 품에 끌어당겼다. 좋아, 태이경. 며칠 전 기분 내려 야근수당을 써서 장안의 비기 향수를 사길 잘했어. 반했지. 장문원. 장문원은 귀가 쫑긋 올리며 기분좋게 웃었다. 기분 좋은 풀과 복숭아 향내가 어우러진 공기가 바람을 타고 문원의 코를 간질였다. 이경의 숨이 가슴깨에 닿아 문원은 그 흔적을 간직하려는 듯 이경을 마주 안았다. 그의 맥박이 맥동하는 것에 이경은 몸을 더 깊이 파고들며 기울였다. 내게 말할게 있죠, 장문원씨. 바람에 실려 목소리는 가늘게 실바람에 떨려나왔다. 내심 제 품에 있는 사람의 말을 기대하는 마음이 반, 그의 말을 알 수 없어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불안감과 조바심이 뒤섞였다.
이번에 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경씨.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요. 태이경씨.
하늘이 푸르고, 봄바람이 불고, 꽃이 봄볕에 제 봉오리를 피올리는 시기 나를 생각해주세요. 우리의 처음, 우리의 맥동 때문이었는지 봄이 움트는 시간이었기 때문인지. 봄바람이 몸을 덮히는 장안성에서 그는 잔주름 없이 웃었다. 그의 손어귀가 가만 움직여 이경의 볼깨를 덮었다 볼 그늘을 지어 주었다. 이경이 제 볼에 신경쓰는 걸 알고 가려주는 순수와 장난이 섞여 해보고만 행동이었다. 이경은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소중한 것을 감싸 안듯 잡고 말끝을 길게 끌며 장난스레 말하였다. 배려에 고맙기도 하네요. 장료. 멋쩍은 듯 그가 손을 내저을 뻔 하다 태오의 손에 온기를 얹으며 말을 건네었다. 태오. 봄볕이 들면 당신을 데리러 가겠습니다. 그는 손에 반지를 끼워주며 수줍게 웃었다. 그것은 당신이 올 봄에 당신을 생각하란 얘기인가요. 예, 낯간지럽지요? 나는 더 낯간지러운 말 할 자신 있는데. 제가 서가에서 나와 보는 하늘은 계절없이 푸르니 하늘을 생각한다면 당신을 매일 생각할 수 있잖아요. 언제든 돌아와요, 장료.
오랜 봄이다. 당신과 나의 봄은 이 전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당나귀와 같아 걸음을 지체하는 것 이었나보다. 아이가 가채를 이을 나이가 되고 청년이 잔주름이 생기고 사람이 변하며 강산이 바뀌어도 바뀌었을 시간이었다. 이경은 제가 보낸 사람들과 변화하고 바뀌어진 관계를 떠올렸다. 제 옆에 함께했던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로 바뀌었다. 군사를 뽑아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고 기존 군사는 죽거나 투항해 사라지거나 하여 태오가 익힌 얼굴은 채 절반이 못 되었다. 전장에서 사람은 풍문이다. 허문이었다. 그 사람이 했던 말과 이야기만이 남아 윤곽만 있자하고 허울없는 형상을 이루었다. 태오는 그의 소식을 허문처럼 전령에게서 전해들었다. 그의 생사를 알건데 소식이 닿을 길은 요원하고, 감정이 사그라들며 꺼져들기 충분한 시간이었기에 그는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지 모르며, 긴 약조를 기억할 일도 만무했다. 태오 손에 끼여진 반지는 각박하고 힘든 시간을 감내한 걸 증명하듯 곳곳에 줄이 그어져 있고 홈이 파여져 있었다.
죽음이 그녀를 동반자 삼지 않고 살아 남은 일에 만족해야 할 일이었을지 모른다. 태오는 문을 열어 상대에게 투항하면 귀빈으로 맞이한다는 제안을 받아들인 제 수석책사 앞에서 부러 뻔뻔하고 당당한 채를 했다. 부관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응어리진 한숨을 쉬었다. 부족한 군사력에 계책에 의존해 죽을 동 말동 한 일에 군사들이 지쳐 그토록 투항소식에 반가워 하는 것은 당연했다. 태오는 성루의 경첩 아래 제 몸을 숙여 몇내 힘든 시간으로 메마른 제 몸을 앉혔다. 불안감이 저를 좀먹지 않고 쓰러뜨려 이루 포기하게 만들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그녀는 상사를 쳐다보았다. 상황을 읽는 것엔 손무 귀신이 와도 저 인간은 한번 골탕 먹이고 지나갈거다. 고생시킨만큼 한 방 말은 하고 싶었다. 그녀가 상사에게 말을 쏘아내는 것은 몇 년 전엔 태오가 황제가 된다는 만큼의 터무니없는 이야기었으나 긴 시간은 뻔뻔함을 대신해 채우고 관계를 변모시켰다. 태오는 이만치 흐른 시간을 느끼며 다시 그를 만나면 아무일도 없었던 듯 인사하리라 마음 먹었다. 잊었을테니까. 책사님, 내가 당신때매 죽을 고비 넘긴 일을 거 내 평생들여도 못 셀걸요. 부하들은 착해서 당신에게 감사하라고 말하지만요. 나는 되바라져서 그런 걸 몰라요. 유능한 부관을 둔데 감사하십쇼. 목숨 값은 못 갚아요. 그녀의 상사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그의 성정답게 입꼬리를 싱긋 올려 가뿐히 웃었다. 백기를 들어 투항을 하고 태오는 상사의 명에 따라 문을 열어 상대편을 맞아들였다.
-상대 장군이 맞이하러 왔습니다. 님은 우리군에 투항한 것에....
-봄이 늦었습니다, 태오. 오래 기다리게 하여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