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로니
아직 많은 사람이 잠들어있을 시간이었지만, 무장탐정사의 대부분은 오늘따라 바쁜 상태였다. 사건도 아닌 일에 이렇게 분주한 것은 드문 일인데, 그 사이에서도 오늘은 어느 때보다 특별하고 중요한 날이었다. 그들의 소중한 일원인 두 명의 결혼식 날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무장탐정사 내부에서는 아키코의 주도하에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왔다. 완벽한 결혼식을 위해서!
-첫 계획의 시작은 새벽에서 아침이 되는 이른 시간부터 시작이었다. 쿠니키다는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나 피곤한 얼굴로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현관에 오자마자 들리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문을 열자, 그곳에는 아키코, 그리고 나오미가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뒤에는 왠지 모르게 피곤해 보이는 준이치로와 아츠시까지. 쿠니키다는 머리를 짚으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너무 이른 것 아닙니까, 요사노 씨?”
“이르다니! 지금도 약간 늦은 시간이야. 그러니까 잠깐 실례할게?”
“잠깐, 코우는.”
“알고 있어, 분명 귀엽게 자고 있겠지! 그러니까 내가 깨우는 수밖에.”
아키코는 쿠니키다의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집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쿠니키다는 이미 포기한 듯 도로 집 안으로 들어가 거실 불을 켰다.
“밖에 있지 말고 너희들도 들어와.”
“아, 그럼 실례하겠습니...…”
그의 말에 아츠시가 들어가려던 찰나에, 나오미는 아츠시의 앞을 팔로 가로막고 싱긋 웃었다. 왠지 모르게 섬뜩한 그 웃음에 아츠시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한 발짝 나간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얼어붙어 버렸다.
“아니에요. 어차피 코우 씨가 깨면 바로 나갈 거니까요. 그러니까 어서 준비하세요, 쿠니키다 씨. 물론 간단하게만요.”
“난 벌써부터 안 해도 괜찮을 것 같다만.”
“어머, 안 괜찮은걸요. 쿠니키다 씨도 준비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들러리가 네 명이나 온 것도 이유가 있답니다. 한 사람에 두 명씩이면 딱 알맞지 않나요?”
나오미는 생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쿠니키다의 방을 가리켰다. 이제 조용히 가서 준비하라는 듯한 손짓에 그는 더 말하지 않고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방 안에 들어갔다. 제일 안쪽에 있는 코우의 방에서는 아키코와 실랑이를 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조금만 더어…”
“조금만 더, 하다가 한 시간이야 코우!”
“아니야, 딱 5분마안… 긴장돼서 잠을 못 잤단 말이에요-…”
“내가 그랬잖아. 그럴 수밖에 없다니까? 그래서 아프지 않게 잘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잖니.”
잠시만. 지금 뭐라고.
아츠시는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되짚어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지만, 내용은 엄청 섬뜩했던 것 같은데. 그는 입을 꾹 다물며 준이치로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준이치로는 아츠시의 눈빛을 이해하겠다는 듯 어색하게 하하, 하고 웃었다.
한편 나오미는 두 사람과는 달리 아키코를 도와줘야겠다는 직감이 들자마자 집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쿠니키다가 방에서 나와 신발장 안에 있던 구두를 신었다.
“그래서, 오늘 계획은 언제까지 있는 거지?”
“역시 쿠니키다 씨. 알고 계셨네요.”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 리가. 뭐, 오늘의 주인공인 녀석은 잘 모르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코우 씨가 모른다면야 성공한 거죠. 그리고 계획은 아마……”
오늘이 끝날 때까지, 였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준이치로는 이미 해탈한 듯한 미소로 쿠니키다의 물음에 답했다. 쿠니키다는 그럴 줄 알았다, 라며 작게 중얼거리고는 구두를 다 신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안쪽을 바라보았다.
“잠까안, 정신, 정신이 없어요…!!”
“괜찮아요. 정신을 차릴 시간이 앞으로 충분한걸요. 몇 시간 동안 앉아있어야 한다니까요?”
“우리가 옆에서 붙잡아줄게. 넘어질 걱정은 하지 말고?”
아무리 봐도 저건 연행인 것 같은데.
현관에 있던 세 사람은 동시에 똑같은 생각을 했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양쪽에 팔을 붙잡힌 채 현관을 향해 걸어오는 코우는 피곤한 듯 하품을 했다.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더니, 바로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쿠니키다였던 걸 깨닫자마자 배시시 웃어 보였다.
“돗포 씨다.”
쿠니키다는 그녀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가, 이내 표정 관리를 하는 듯 헛기침을 하는 체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코우는 그런 그의 행동이 귀엽다는 듯 아까보다 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키코는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방금 쿠니키다 군이 아닌 걸 보고 말았어. 얼른 가자, 코우.”
“왜요, 보기 좋았잖아요?”
“그렇긴 한데, 하여튼 방금 그 사람은 쿠니키다 군이 아니야.”
나오미는 아키코의 대답이 재밌었는지 후후, 하고 웃으며 그녀와 함께 신발을 대충 구겨 신은 코우를 붙잡은 채로 현관 밖을 빠져나갔다. 아츠시와 준이치로는 고개를 여전히 돌리지 못하고 있는 쿠니키다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다가갔다.
“저기, 쿠니키다 씨.”
“괜찮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어서 가지.”
쿠니키다는 안경을 고쳐 쓰며 빠른 속도로 현관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몇 초 새에 벌써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쿠니키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그를 뒤쫓아갔다.
“쿠, 쿠니키다 씨! 그쪽이 아닌데요!”
“같이 가셔야죠…!!”
“코우 씨, 앞에 좀 봐볼래요?”
헤어숍에서 한창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코우는, 나오미의 목소리에 앞에 있던 거울을 바라봤다. 왜 그런지 영문을 모르고 있던 그녀는 거울로 나오미를 쫓아 자신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기자마자 의도를 알아챘다. 나오미의 손에 작은 캠코더가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캠코더잖아요!”
“맞아요. 찍어서 영상으로 만들고, 이따가 식중에 틀어볼까 해요.”
“앗, 설마 한 번에 편집 없이 찍는 그런 건가요?!"
“그럴 리가요. 이미 만들어놓은 게 있는데, 거기에 조금 편집해서 넣으면 돼요.”
나오미는 나긋하게 대답하면서 거울에 비치는 코우의 모습에서 캠코더를 옮겨 그녀의 옆모습을 찍기 시작했다. 코우는 살짝 쑥스러운 듯 설핏 미소 지었다가, 이내 활짝 웃어 보였다.
“아, 근데 시간이 촉박하지 않을까요?”
“괜찮아. 이거면 해결되거든.”
잠시 음료를 사러 밖에 나갔던 아키코는 들어오자마자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며 손으로 돈을 뜻하는 듯한 표시를 했다. 코우는 그 대답에 단번에 이해가 됐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웃었다. 아키코는 코우의 모습을 거울 너머로 잠시 바라보다가, 벌써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매끄럽게 올리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사 온 음료 중 하나인 딸기 스무디를 화장대 옆쪽에 올려놨다.
“맛있겠다! 고마워요, 언니!”
“별말씀을. 신부님을 위해서라면야.”
아키코는 그녀에게 윙크하고는 자신의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나오미는 촬영에 열중한 듯 캠코더의 각도를 이리저리 맞추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이 캠코더 화면을 바라보며 어떤 각도가 제일 나은지 결정한 후, 준비가 끝났다는 듯 손뼉을 한 번 치고는 촬영을 시작했다.
“자, 이제 진짜 촬영 시작이야. 오늘은 4월 3일, 쿠니키다 군과 코우 양의 결혼식이랍니다!”
“축하해요, 코우 씨!”
“고마워요, 두 분뿐만 아니라 모든 분들한테요!”
코우는 행복하다는 듯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아직 다 끝내지도 않았는데 너무 예쁜 거 아니야? 쿠니키다 군, 표정 관리 하느라 애쓰겠는데?”
“맞아요. 쿠니키다 씨, 아까도 그러셔서 아키코 씨가 한마디 하셨잖아요.”
나오미가 캠코더 너머에서 특유의 말투로 툭 내뱉었다. 아키코는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내며 그때 일을 떠올리는 듯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익숙하지 않은 표정인데 어떡해.”
뭐, 보기 싫은 건 아니었지만.
아키코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대꾸했다. 코우는 그 대답에 작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특히나 그녀, 그리고 다른 사람과 같이 있으면 어떻게든 표정을 숨기려 애썼으니까. 그 자신도 흔히 짓는 표정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걸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게 부끄러운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코우와 단둘이 있을 때면 잘 숨겨지지 않는다는 점이 그녀는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가볍게 인사는 끝났으니까 이제는…"
아키코는 준비해온 게 있는 듯 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코우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질문 타임이야! 여러 질문을 할 거니까 우선... 가볍게, 오늘 준비하면서 드는 느낌부터 말씀해주시죠, 코우 씨?”
“음… 느낌이라면, 사실 많이 긴장돼요! 설레기도 하고. 물론 혼인신고는 이미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결혼식을 하니까 실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에요.”
“그럴만하지. 오늘 긴장돼서 잠도 많이 못 잤다면서요?”
“맞아요… 일찍 자려고 눕긴 했는데, 아무리 뒤척여도 잠이 안 와서 애먹었어요. 원래 누우면 금방 잠이 오는데 말이에요!”
그게 제 자랑 중 하나였는데.
코우는 한숨을 작게 쉬며 간밤에 했던 수많은 일을 떠올렸다. 달밤에 스트레칭을 하기도 하고, 어려운 책을 읽어보기도 했다. 그 밖에 온갖 방법으로 자려고 수없이 애썼으나 오히려 정신은 더욱더 또렷해졌었다. 하마터면 날을 샐 뻔했어.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취했죠.”
“호오, 궁금한데? 어떤 조치인가요?”
“토끼가 된 돗포 씨로 가득 둘러싸여 있는 상상을 하는 거예요.”
“…그게 진짜 특단의 조치라고?”
“오히려 잠이 깰 것 같은데요.”
두 사람은 번갈아 가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그런 그녀들의 대답에도 코우는 진심이었는지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토끼는 폭신폭신하잖아요! 작고, 귀엽고.”
“음… 그건 맞지.”
“그리고 돗포 씨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고요.”
“그것도 맞지.”
“그러니까 토끼 돗포 씨가 둘러싸여 있는 상상은 더없이 행복하고, 따뜻하고, 폭신하니까 그 만족감에 잠이 오는 거죠!”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야…?”
아키코는 상상해보려고 시도하다가, 결국에 자신만 힘들 것이라는 걸 깨닫고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코우만 가능한 상상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잠까지 오다니.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든 뒤 황급히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이 질문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그럼 다음 질문!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어땠었는지 말해주세요.”
“첫 만남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전 떨어졌었고, 돗포 씨는 그 소리에 놀라서 다가왔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전 느꼈죠.”
“운명이라는 걸요~?”
“맞아요, 나오미 씨! 이 사람은 내 운명이다, 싶어서 바로 붙잡았죠! 갈 데가 없는데 데려가 달라고.”
“이건 아무리 들어도 놀랍다니까.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른 상태에서 그랬다는 게?”
“제가 워낙 감은 좋거든요. 이것저것 하면서 터득한 감이라서, 웬만하면 적중이라니까요?”
진짜예요!
코우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거울 너머에서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을 하는 아키코를 바라보았다.
“아니라면, 이렇게 좋은 분들 사이에 있을 리가 없잖아요!”
“어머. 감동이잖아요?”
“왜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하나 몰라? 마음 같아서는 꼭 끌어안아 주고 싶지만, 참아야겠어. 드레스가 망가질 수 있으니까 말이야.”
아키코는 근질거리는 손을 코우 대신 종이를 꼭 쥔 채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다음 질문과 이어지는 거긴 한데, 그럼 쿠니키다 군의 어디를 보고 반한 거야?”
“으음… 잘생겼잖아요!”
“확실히 그렇긴 하죠. 쿠니키다 씨는 냉미남 같달까.”
“맞아요! 거기다 돗포 씨는 코가 예쁘잖아요!”
코가 높긴 하지.
아키코는 코우의 말에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우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종종 곱씹어보곤 했던 기억이었으나, 정확히 어디에 반했었는지는 막상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눈에 들어왔었다고 느꼈었는데.
…그러고 보니.
코우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그동안 그녀조차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반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단언할 수가 있었다. 왜 그동안 그저 느낌 때문이라고만 생각한 거였을까? 이렇게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첫눈에 반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딱 하나 있었어요!”
“딱 하나? 어떤 건데?”
“눈. 눈이었어요.”
혹여나 자신을 뒤쫓았던 자들일까 봐 죽은 체하며 망설이다, 꼭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그 순간에 얽힌 시선과 눈동자는 왜 기억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상당히 강렬했다. 쿠니키다의 눈빛 자체가 강렬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사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투명하다고 생각했어요. 순간 그렇게 느꼈었고, 전 확신했죠. 저 눈빛에 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고!”
“투명이라… 신기하네. 첫눈에 그걸 느낀 사람은 드물 텐데.”
“앗. 그런가요?”
“아무래도 쿠니키다 씨의 눈빛은,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무섭다고 느끼는 게 대부분이죠?"
“맞아. 쿠니키다를 한 번에 제대로 보다니. 역시 천생연분이다, 이거지? 응?”
“이런 게 운명이라고 하는 거겠죠~? 아, 제가 다 행복해지는걸요?”
“아니에요! 그러니까, 운명이라는 건 제 생각에도 맞는 것 같긴 한데… 아, 이게 아니지!”
두 사람의 놀리는 듯한 말투와 행동에, 코우는 볼이 발그레해지며 횡설수설 대꾸하다가 입을 황급히 다물었다. 그걸 본 아키코와 나오미는 귀엽다는 듯 크게 웃기 시작했고, 코우도 푸스스 웃음을 지었다가 두사람을 따라 기분이 좋은 듯 크게 소리 내 웃어보였다.
코우가 있는 방 반대편에 위치한 방 안에서는 쿠니키다 역시 메이크업에 한창이었다. 피곤한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듯 입꼬리는 평소보다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런 그의 뒤에 있는 아츠시와 준이치로는 반대편 방에서 열심히 찍고 있는 두 사람과 같은 역할을 한창 하던 중이었다. 준이치로는 캠코더 줌을 당겨 쿠니키다의 표정을 조금 더 가까이 찍고 있었고, 아츠시는 그런 준이치로의 입에 도넛 하나를 물려주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에 아츠시는 방 바깥을 힐끔 바라봤다가 싱긋 웃었다.
“건너편은 재밌는 얘기를 하고 있나 보네요.”
“그런가 보군.”
“평소에도 잘 어울리니까요. 쿄카까지 같이 있으면 더 즐거워할 텐데.”
“음… 쿄카도 곧 올 것 같은데요? 사장님이 이때 쯤에 같이 데리고 오겠다고 했거든요.”
쿠니키다는 그렇군, 하고 작게 대답했다. 그는 아직도 이 상황이 어색한지 한숨을 작게 쉬었다.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긴장될 뿐.
지난밤 코우에게 얼른 자라고 신신당부했었으나, 그러는 자신 역시도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애초에 수면시간이 긴 편이 아닌 게 다행일 따름이었다. 밤을 지새우는 게 익숙한 좋지 않은 습관이, 이럴 때는 상당히 도움이 됐다. 그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눈이 살짝 뻑뻑하게 느껴졌다. 인공눈물이 코트에 있던가.
준이치로는 캠코더 화면으로 거울에 비친 그를 유심히 살피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주머니에서 인공눈물을 꺼냈다.
“쿠니키다 씨. 저 인공눈물 있는데, 드릴까요?”
“아, 마침 필요했는데. 고맙다.”
아츠시는 준이치로에게 인공눈물을 건네받은 뒤 쿠니키다의 손에 쥐여주었다. 쿠니키다는 담당 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한 뒤, 한 방울씩 눈에 떨어뜨렸다. 건조했던 눈이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인공눈물을 갖고 다닐 줄 몰랐는데.”
“사실, 갖고 다니진 않아요. 나오미가 필요할 수도 있다고 챙겨 가라고 했거든요.”
들러리의 역할이 그런 거라면서 신신당부했어요.
준이치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쿠니키다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이래저래 해도, 모두가 두 사람을 위해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다음 질문이 더 있지 않았나?”
“아, 네! 아직 더 남아있어요. 그러니까… 코우에게 언제 처음 진심으로 반하게 됐나요?”
“…분명히 이 질문을 만든 사람은 요사노 씨겠지.”
“하하… 네.”
쿠니키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곰곰이 생각하는 듯 미간을 구겼다. 아츠시는 그런 그가 내심 신기하다고 느꼈다.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질문을 패스한다거나 하지 않겠다고 얘기하진 않았다. 예전이라면, 실없는 짓이라며 그만둘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자신은 미미하게 변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확연히 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한 사람에 의해서. 성격뿐만 아니라 무언가 중요한 것도 함께 변하고 있었다.
“코우가 온 지 몇 달 지났을 때의 일이었던 것 같은데. 여름 직전이었던가. 코우랑 같이 임무를 나갔다가 돌아왔던 때였었지.”
“아, 그때요? 쿠니키다 씨가 꽤 다쳐서 들어왔잖아요?”
“맞아. 방심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온 습격을 막을 수가 없었고, 코우까지 위험하게 할 수가 없어서 후퇴해서 구조를 요청하고 숨어있으라고 했었어. 어느 정도 막고 나 역시도 후퇴할 속셈이었고. 근데 컨테이너 위쪽에 여러 무리가 숨어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고, 꼼짝없이 총을 모조리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자세한 내용은 처음 듣네요.”
“자세하게 설명할 사건은 아니었으니까. 아래쪽을 어느 정도 수습한 후에서야 위쪽에서 방아쇠 소리가 들리더군. 한 방이 어깨에 맞고 나니, 주위 적들이 모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이 순간 지원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었는데, 막상 온 건 지원이 아니고 코우였지. 숨어있으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듣고 나타나서, 말 한마디도 없이 대신 내 손을 한 번 꼭 잡았다가 앞으로 나갔어. 그리고 순식간에 꽤 되는 적들을 모두 넘어뜨렸지.”
쿠니키다는 그때를 생각하는 듯 설핏 웃어 보였다. 위험한 이능력이었다. 그렇기에 코우가 다루기엔 아직 이르다는 판단을 했었다. 그러나 그건 그 자신의 기우일 뿐이라는 것을 그 순간 느꼈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정확하게 적지 않은 수의 적들을 한 번에 처치했었다. 필요 이상의 공격도, 어설픈 저격도 없었다. 코우는 그의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쿠니키다는 그 이후의 순간이 아직도 생생했다. 장미꽃의 색에 맞춰 반쯤 빨갛게 물든 코우의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석양은 그녀의 앞을 비추고 있었다. 주위가 확실히 잠잠한 것을 확인하는 듯 조용히 앞만 바라보던 코우는 불현듯 몸을 돌려 어깨를 붙잡고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눈 속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코우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에게 대꾸했다.
‘걱정했잖아요!’
아까까지만 해도 한없이 강했었는데, 이제는 그가 걱정된다는 이유만으로 울고 있었다. 그는 그 순간 깨달았다. 그녀가 줄곧 좋아한다고 한 것이 마냥 가벼운 것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걸 깨달은 이상, 그는 코우의 마음을 더는 마냥 넘길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쿠니키다 씨?”
쿠니키다는 아츠시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츠시는 고개를 갸웃하며 쿠니키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얘기는 여기서 끝인가요? 그때 반했다는 거겠죠…?”
“그래. 언제 반했는지 물어봤지, 무슨 이유로 반했는지 묻지 않았으니까.”
“앗. 그러고 보니 진짜네요…...”
“그럼 지금 물어보는 건 가능할.”
“그건 거절하지.”
쿠니키다는 준이치로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준이치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하, 하고 웃음 지었다. 아무리 부드러워졌다고 해도, 쿠니키다는 쿠니키다였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록 할까.”
“앗, 네! 코우의 장단점을 한 가지씩만 대답해주세요!”
“그건 쉬운 질문이군. 장점이라면, 어떤 사람이든 간에 긍정적으로 대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게 제일 아닐까.”
“아, 맞아요. 그래서 코우를 만난 사람 중에 무작정 싫어하는 사람이 손에 꼽긴 하죠.”
“뭐랄까. 코우 양은 워낙 성격도 낙천적이라 더 그러기도 한 것 같아요.”
“그렇지. 적을 보면 웃으면서 안부를 묻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역시 유일하겠죠……”
아츠시의 말에 준이치로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적조차 그녀의 행동에 당황스러워하며 페이스에 휘말리기 일쑤였다. 어찌 보면 단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에게는 그 단점의 이유를 보완할 만큼의 큰 장점이었다.
“단점은… 꼭 한 가지만 얘기해야 하나.”
“제발 한 가지만 해주세요, 쿠니키다 씨…….”
“그러면 역시... 그 점이지. 단것 좀 적당히 먹어라, 코우! 삼시 세끼는 이제 꼬박꼬박 먹으니 식습관은 훨씬 나아졌지만, 여전히 단 걸 많이 먹는 습관은 그리 좋지 않다!”
쿠니키다는 단점을 얘기하자마자, 캠코더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호통에 가까운 대답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츠시는 난데없는 상황에 잠시 멍해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준이치로한테 작게 말을 내뱉었다.
“갑자기 영상 편지를 시작하셨는데요…?”
“크레페는 하루에 한 번! 크레페를 먹으면 당일에 파르페는 금지다! 사탕은 최대 세 개! 초콜릿은 두 개까지만!”
“아츠시 군, 그냥 놔둬. 조금 있으면 이성이 돌아올 테니까.”
“자기 전에 양치질은 꼭꼭 하고! 알겠나! 음. ...이상이다.”
“내가 그랬지?”
준이치로는 예상한 일이라는 듯 늘 짓는 웃음을 보이며 아츠시를 바라보았다. 아츠시는 그렇네요, 라고 대꾸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장점은… 으음, 역시 자상하다?”
코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없이 많은 장점이 있었기에, 가장 두드러지는 장점 중 하나를 대답하다 보니 나온 것이었다. 코우는 이게 최선이라는 듯 고개를 세차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만 얘기하자면, 자상함인 것 같아요! 맛있는 밥도 항상 준비해주고, 아픈 기미가 보이면 알아채서 꼭꼭 약도 사주고, 조금 우울하다 싶으면 달콤한 것도 사주는걸요!”
“안 그런 척하지만 자상하긴 하지.”
“맞아요. 게다가 워낙 꼼꼼하신 분이라, 저도 잘 깨닫지 못했던 부분에서 챙겨주신 적도 많고요.”
“일의 능률이 떨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매번 말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건 무장탐정사 모두가 알걸.”
코우는 불현듯 쿠니키다가 매번 자신을 챙겨줄 때면 짓는 표정이 생각나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아무렇지 않게 챙기곤 하지만,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할 때면 어딘가 살짝 긴장한 듯 짓는 미묘한 표정은 코우도 최근에서야 알게 된 표정이었다. 언뜻 보면 평소와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살짝 빨개져 있는 귀는 무언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단점은… 자신을 너무 혹사시키는 거! 그것만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코우를 만난 이후로 조절은 하게 된 것 같은걸? 예전엔 완벽한 이상을 위해서 너무 노력했었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너무 많이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잠도 조금만 더 자고!”
“그러면 조금 더 늦게 잘 수 있으니까, 말이죠?”
“그렇죠! …가 아니라! 그것도 아니라고 할 순 없지만, 역시 피곤해하는 게 가장 걱정이에요. 늘 얘기해도 모자란다니까요.”
“그으래? 그럼 이 타이밍에서 영상 편지 시간!”
아키코는 손가락을 경쾌하게 튕기며 뒤로 물러났다. 마침 코우의 메이크업을 모두 마친 상태였고, 나오미는 아키코가 있던 자리로 옮겨가 코우의 의자를 뒤로 돌린 뒤, 캠코더가 코우의 정면을 향하게 했다.
“어머, 코우 씨 너무 예쁜데요?”
“그래? 어디 보자… 아니, 진짠데? 오늘 사진 많이 찍어둬야겠다. 딱 예쁘게 잘 나오겠네.”
“진짜요?”
코우는 쑥스러운 듯 푸스스 웃었다. 메이크업과 머리까지 다 마친 코우는 어느 때보다도 봄의 벚꽃과 잘 어울렸다. 그녀는 목을 살짝 가다듬은 뒤, 캠코더 화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돗포 씨! 일이든 뭐든 정확하고 완벽하게 하는 건, 돗포 씨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조금만 자신을 생각하는 게 어떨까요? 물론, 예전보다는 훨씬 생각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옳소, 옳소.”
“계속 이렇게 행사하면, 한 번 크게 쉬게 해드릴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옳소, 옳…”
잠깐.
아키코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의심했다. 분명 방금 상큼하게 얘기한 것 같은데. 생글생글 웃고 있는 코우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키코는 방금 들었던 말이 진심이었음을 깨달았다. 맞아, 이럴 때는 가차 없었지.
“코우 언니, 안에 있어?”
타이밍 좋게 문 앞에서 익숙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키코는 대답 대신 방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러자, 밖에 서 있던 후쿠자와와 그의 품에 안겨있는 쿄카가 보였다. 두 사람은 방 안으로 들어가 준비가 끝난 코우에게 다가갔다. 쿄카는 후쿠자와의 품에서 내려와 코우의 손을 꼭 잡았다.
“코우 언니, 오늘 예쁘다.”
“진짜-? 쿄카쨩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언니가 너무 행복한데?”
코우는 미소를 활짝 지은 채로 쿄카의 뺨을 어루만졌고, 쿄카는 그런 코우를 향해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 후쿠자와는 그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쿄카 말대로야. 오늘 가장 아름답군.”
“에헤헤, 감사해요, 사장님! 칭찬도, 또 식장도요! 사장님 덕에 벚꽃이 예쁜 곳에서 결혼도 할 수 있게 됐는걸요!”
“저번부터 말했지만, 그렇게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다.”
그래도요!
코우는 여전히 환한 웃음을 지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간씩 손보고 있던 머리까지 완전히 끝난 상태였다. 아키코는 코우의 드레스 뒤쪽을 손보기 시작했고, 나오미는 촬영의 마무리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코우를 여전히 찍고 있었다.
“아, 맞다. 코우 씨! 가기 전에 마지막 질문이 있어요.”
“앗, 그래요?”
“짧은 거니까 금방 끝나요. 끝으로, 쿠니키다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을 딱 한 마디로 한다면?”
“딱 한 마디… 으음……”
코우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가, 몇 초 지나지 않아 대답을 떠올렸는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노래하듯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잡은 손, 앞으로 절대 놓지 않을게요!”
“쿠니키다 군?”
미닫이문을 확 열자마자 들리는 목소리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애초에 세 사람은 확인할 필요도 없었으나, 갑작스럽게 열린 문으로 인해 나온 반사 신경적인 행동이었다. 쿠니키다는 문 앞에 서 있는 다자이를 보자마자 애써 풀고 있던 미간을 다시 구겼다.
“난 아직 아무 일도 안 했네만. 그 표정 좀 풀지 그래~?”
“아,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라서.”
“흑흑. 그렇게 차갑게 굴면 나, 상처받는다네. 분명 저번에는 상냥하게 대해주기로 하지 않았나.”
“내가 언제…!”
“신랑분!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시면 안 돼요!”
쿠니키다는 우는 시늉을 하며 내뱉는 그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가, 담당 선생님의 말에 화를 꾹 참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아츠시는 쿠니키다의 팔을 잡으며 참으세요 쿠니키다 씨, 라고 작게 말했다. 다자이는 그런 그의 모습이 재밌는지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오늘만큼은 조용히 좀 있어라, 다자이.”
“애초에 날뛰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말일세?”
“그래도 그냥 조용히 있어.”
“너무하네, 쿠니키다 군……”
다자이는 상처받았다는 듯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고, 쿠니키다는 그 모습을 노려보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진정하려고 해도 저런 모습을 보다 보면 화가 조금씩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년을 본다 한들 똑같을 게 분명했다.
“음… 대충 마무리가 되어가니까, 마지막 질문할게요!”
“아직 질문이 남아있었군.”
“캠코더 배터리도 넉넉하진 않아. 조금 빠르게 부탁해.”
준이치로의 말에 아츠시는 고개를 끄덕인 뒤, 쿠니키다를 바라보며 마지막 질문을 내뱉었다.
“다행히 마지막은 간단한 질문이에요! 코우에게 하고 싶은 말을 딱 한 마디로 해주세요!”
“지금까지 들었던 질문 중에 가장 간단하군.”
쿠니키다는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말 중에, 가장 하고 싶었던 말 한 마디를 망설임 없이 택했다. 그리고 아까 찌푸리고 있던 표정과는 달리 부드럽게 살짝 미소를 지은 채로 명료하게 내뱉었다.
“잡게 된 이상, 네 손을 놓을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식장에 다다르기도 전에 살풋 밀려오는 벚꽃 향기는 지금의 봄의 적기임을 알리는 듯했다. 식장으로 향하는 벚꽃길 아래에는 카펫인 마냥 이제 막 떨어지고 있는 벚꽃잎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머리 위에는 연분홍빛의 만개한 벚꽃나무들과, 그사이에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복사나무의 꽃이 드문드문 보였다. 하늘은 흐리기만 했던 어제와는 달리, 부드러운 하늘색 사이에서 폭신할 것만 같은 흰 구름이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두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흰색의 결혼식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결혼식 장소는 사무소랑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벚꽃 명소에 자리를 잡은 야외 식장은, 후쿠자와, 란포, 그리고 켄지의 주도하에 계획대로 잘 완성되어 갔다. 마지막 하객 의자까지 놓고 나서야 식장 준비는 끝이 났고, 쿠니키다랑 코우는 이제 막 준비를 끝낸 란포와 켄지에게 다가갔다.
“란포 씨, 켄지 씨!”
“수고 많으셨습니다. 많이 힘드셨을 텐데요."
“힘들긴. 꽤 재밌었어~. 이런 일을 언제 또 해보겠어, 응?”
“두 분 다 수고 많으셨어요! 아침 일찍부터 너무 고생하셨어요. 감사드려요!”
“이 정도 일 쯤이야, 아무렇지 않은걸요! 그나저나 오늘 두 분 다 너무 멋있잖아요!”
켄지는 우와, 라고 내뱉으면서 두 사람 주위를 이리저리 빙빙 돌아다녔다. 코우는 켄지를 눈으로 좇으며 즐겁게 웃었고, 쿠니키다 역시 못 말린다는 작게 웃어 보였다. 란포는 그 와중에 두 사람을 관찰하는 듯 빤히 바라보다가 두어 번 끄덕였다.
“으음, 완벽한데. 아무리 봐도 선남선녀잖아? 나도 켄지 군 말에 동감.”
“감사해요. 오늘 1년 치 칭찬 전부 다 듣는 것 같다니까요!”
“그 정도는 들어야지. 들을 자격 충분해! 안 그래, 쿠니키다 군?”
“그렇죠. 오늘은 코우의 날이니까요.”
쿠니키다의 대답에 코우는 기분이 좋다는 듯 눈웃음과 함께 생긋 미소지었다. 쿠니키다는 코우를 바라보지 않았지만, 살짝 빨개져 있는 귀가 그 답을 대신해주었다.
“좋아, 그럼 이제 신랑신부님. 하객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지?”
“맞아요! 아까 전부터 대기하고 계시는 상점가 분들도 계시던데!”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러게요! 그럼 먼저 가볼게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결혼 축하해!”
“결혼 축하해요!”
란포와 켄지의 축하를 시작으로, 벚나무 가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다른 말보다 두 사람의 결혼을 가장 먼저 축하해 주었다.
그들이 초대한 하객들은 무장탐정사 일원들은 물론이고 무장탐정사에 도움을 준 사람들과 상점가의 친한 사람들, 그리고 코우와 친한 카페 사장님 등 친한 사람들이 전부였다. 규모가 큰 식장이 아니었을뿐더러, 애초에 간소하게 하고자 준비한 결혼식인지라 좋은 사람들만 초대하고 싶다는 게 두 사람의 공통적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초대받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벚꽃이 피어난 길을 따라 들어오고 있었고, 쿠니키다와 코우는 바로 앞에서 환하게 하객들을 맞이하며 그들의 진심 어린 축하와 선물을 받았다.
상점가 꽃집 사장님의 커다란 꽃다발 선물로 코우는 꽃 사이에 파묻혀버렸고, 덕분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쿠니키다가 꽃다발을 대신 받아주었다. 코우는 꽃 덕에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면서 쿠니키다에게 고마워요, 라고 감사 인사를 하며 푸스스 웃었다.
“코우…!”
하객들을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있던 코우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익숙함을 곧바로 느꼈다. 최근에 들은 목소리라서 익숙한 게 아니었다. 마치 조금 오래전에 줄곧 들어왔던, 그런 그리운 목소리. 코우는 아까와 달리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자마자 그녀의 눈가에는 금세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코우는 애써 눈물을 참으려는 듯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로 익숙한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작게 내뱉었다.
“할머니…!”
코우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나 있는 노인은 안겨있는 코우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있었다. 쿠니키다는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이전에 코우가 얘기했었던 말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코우의 옆으로 다가갔다.
“으, 흐윽, 할머니."
“아가, 뚝. 그만 울어. 기껏 예쁘게 했는데 다 망가지잖니.”
“응. 알겠, 알겠어요.”
코우는 그녀를 감싸고 있던 팔을 푼 뒤, 코를 훌쩍이며 울지 않으려 애를 쓰는 듯 찡그리고 있던 얼굴을 더 찡그리고 있었다. 쿠니키다는 그런 코우를 살짝 끌어안고 토닥여주었다. 노인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따뜻한 눈길로 지켜봐 주고 있었다.
“코우. 더 울면 이따 사진에서 붕어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부, 붕어눈이라뇨…!”
“진짜다.”
“진짜로요…?”
“응.”
“그럼 더 울면 안 되지.”
코우는 코를 두어 번 더 훌쩍이더니, 눈에 힘을 팍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노인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앗, 웃지 마세요…!”
“아하하, 웃긴 걸 어떡하니, 얘야? 어쩜… 너는 여전히 한없이 맑은 아이구나.”
“그래도 예전보다는 조금 다르다니까요?”
“얼굴이 조금 더 성숙해진 것 빼고는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코우?”
노인의 대답에 그녀는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잠시 있다가, 잊고 있던 게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뜨며 노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소개를 못 했어요! 이쪽은 제 남편, 쿠니키다 돗포 씨에요! 그리고 돗포 씨, 이쪽은 제가 저번에 말했던 할머니세요!”
“코우를 통해서 얘기 종종 들었습니다. 쿠니키다 돗포라고 합니다.”
쿠니키다는 허리를 숙이며 그녀에게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노인은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코우가 예전부터 쿠니키다에게 말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 보살펴주던 사람들의 얘기. 조화를 파는 꽃가게 사장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막과자를 만드시던 할아버지, 우동집 이모, 책방 언니, 그리고 어떤 것보다도 따뜻했던 된장국을 만드시는 할머니. 코우는 항상 잊을 수 없는 분들이라며 그들의 고마움을 종종 늘어놓곤 했다.
그중에서도 된장국, 가정식을 만들던 할머니는 가장 감사한 분이라고 말하며 활짝 웃던 적이 많았다. 무장탐정사 전에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며, 동시에 가장 오래 있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이능력 때문에 유리창이 부서진 적이 있어서, 더 피해를 줄까 봐 유리창 값을 남겨놓고 떠났었다고 했다. 아마 많이 놀라셨을 거라며 드물게 쓴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했었다.
코우는 없어졌을 수도 있지만, 혹시하는 마음으로 기억을 더듬어서 자신이 신세를 졌던 모든 사람에게 닿길 바라며 청접장을 보냈었다. 그게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녀는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보고는 싶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존재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저 자신의 소식을 알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고 오늘 아침까지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눈앞에서 보게 되니, 그 감정을 쉬이 설명할 수 없었다. 자신의 동반자인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이 순간까지도 자꾸만 벅차오르는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쿠니키다는 맞잡은 노인의 따뜻한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얘기해줄 때마다, 늘 궁금했던 사람이었다. 코우의 얘기를 듣다 보면, 얼마나 친절하고 마음이 따뜻한 분인지 느껴졌으니까. 마땅히 묵을 곳도 없던 어린 코우를 집에 들였다는 게, 그리고 손녀처럼 대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겪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주 보고 있는 노인의 표정은 손과 마음처럼 따뜻하고,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반가워요. 청첩장을 보면서 꼭 만나고 싶었는데,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네요.”
노인은 한쪽은 쿠니키다의 손, 남아있는 한쪽은 코우의 손을 다시 잡고는 나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사실, 이 애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줄곧 생각해왔다우. 코우가 그만 실수를 하고 그다음 날 떠났을 때, 그제야 아차 싶었었지. 괜찮다고 바로 말하는 것을 까먹어 버렸거든. 나도 사람인지라, 놀랄 수밖에 없어서 말이야.”
코우는 노인의 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근데, 놀란 것도 잠시였어. 별거 아니란 생각이 그다음에 들었거든. 어쨌든 코우는 여전히 코우였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나보다 더 놀랐을 테니, 다음 날 아침에는 가장 좋아하는 딸기모찌를 만들어주리라 생각했지. 그리고 실수한 거니까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어. 그리고 다음 날 후회했지. 마음이 여리다는 걸 조금 더 염두에 뒀다면 떠날 일도 없었다고 여러 번 생각했어.”
“할머니 탓이 아니에요. 저는 그저, 제 능력으로 할머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걸요.”
“걱정해서 그렇다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아가, 그래도 나는 그때 놀란 너를 위로하지 못했던 게 미안할 뿐이란다.”
“미안하다뇨. 제가, 제가 더 죄송한걸요. 놀라게 만든 것도 그렇고, 유리창도…”
“더 놀란 건 너였잖니. 그리고, 처음부터 유리창 깨뜨린 일을 혼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단다. 마침 낡아서 바꿀 때가 됐었거든.”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작게 후후, 하고 웃었다. 코우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 있었고, 쿠니키다는 그런 그녀가 걱정되는지 힐끔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살짝 건넸다. 노인은 코우에게 두고 있던 시선을 쿠니키다에게로 옮기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동안 코우가 불안해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에서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 라고 기도했지요. 다시 오긴 힘들 테니, 그거라도 하자고 한 일이었지. 난 무신론자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열심히 기도했죠. 그래서 신께서 들어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기도 덕분인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렇죠? 며칠 전에 식당 근처 상점가 사람들에게 물었는데, 무장탐정사가 유명한 곳이더군요. 이롭게 이능력을 사용하기로 유명하다고. 그래서 일단 안심이었어요. 그리고 지금, 쿠니키다 군의 눈빛을 보고 나니까 완전히 안심할 수 있겠다고 느꼈어요. 눈빛에서 이 애를 많이 사랑하는 게 느껴지거든.”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나야말로 감사해요. 이 아이도 쿠니키다 군 덕에 많이 강해지고, 더 긍정적으로 변한 것 같네요. 쿠니키다 군 역시도. 연장자의 감은 틀린 법이 없으니까요.”
“맞아요, 할머니. 돗포 씨가 옆에 있어서 더 강해질 수 있었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코우는 어느새 눈물을 그치고 밝은 표정으로 노인에게 대답했다. 쿠니키다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녀의 답에 이어서 말했다. 노인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가에 가득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제는 기도를 바꿔야겠네. 오래오래 둘이 행복하게 해달라고 말이야.”
노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쿠니키다의 손에 반듯하게 접은 흰색 종이봉투를 쥐여주고는 식장 쪽으로 느릿하게 걸어갔다. 두 사람은 그런 노인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노인이 줬던 흰색 봉투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건.”
“…할머니.”
봉투 안에 있던 건, 돈이었다. 몇 년 전 코우가 유리창 값으로 올려놨던 돈. 그때의 돈인 듯 조금 낡은 지폐와 동전이 빠짐없이 봉투 안에 담겨있었다. 코우는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쿠니키다는 이번에는 말없이 그녀의 팔을 꼭 잡아 끌어안고 토닥여주었다.
“으, 어떡해. 너무 울었어요…...”
“그래서 요사노 씨한테 혼난 것 같던데.”
“맞아요……”
할머니가 들어간 후로, 청첩장을 보냈던 모든 사람이 빠짐없이 그녀를 찾아왔다. 옆집에 보냈다며 하마터면 못 받을 뻔했다고 장난스레 얘기하던 책집 사장님을 제외하면, 모두 잘 전달받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코우는 눈물이 마를 새가 없이 울어서 눈이 부어버렸고, 식을 올리기 바로 직전이 되어서야 붓기가 거의 가라앉게 되었다.
“설마 모두 올 줄은 몰랐죠. 이사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할아버님이 그랬잖아. 이사를 못 갔다고.”
“그니까요. 제가 혹시라도 찾아올까 봐… 으, 안 돼. 이 이상 더 울면 안 돼!”
코우는 다시 눈에 힘을 힘껏 주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없이 맑은 날이었다. 시야 가득 맑은 하늘색과, 하늘에 잘 어울리는 연분홍빛 꽃의 광경이 쏟아져 들어왔다. 팔랑거리며 떨어지고 있는 벚꽃잎은 따뜻한 4월의 향긋한 눈과도 같았다.
그녀는 문득 이 순간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행복해서 현실이 마치 꿈만 같은 느낌. 딱 그런 기분이었다. 코우는 위쪽에서 시선을 옮겨 자신의 오른쪽에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연인, 배우자, 그리고 함께 갈 동반자.
베이지색 수트는 그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처음 옷을 보자마자 딱 이거라고 느꼈었는데. 코우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했다. 복숭아꽃과 벚꽃이 섞인 부토니에르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코우는 문득 그에게 하지 않은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이걸 까먹을 수가 있지!
“돗포 씨! 그러고 보니 하지 못한 말이 있어요.”
“뭔데?”
“원래도 잘생겼지만, 오늘도 잘생겼어요! 베이지색 수트 어엄청 잘 어울려요.”
“누가 강력히 주장했던 옷이긴 했지.”
“그래요? 누군지는 몰라도, 눈썰미가 너무 좋은 거 아니에요?”
코우는 말이 끝나자마자 재밌다는 듯 활짝 웃었다. 쿠니키다는 못 말린다는 듯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가, 이내 픽 웃었다. 그리고 잠시 무언갈 망설이는 듯싶더니, 그녀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오른손에 느껴지는 익숙한 손길에, 그녀는 눈을 잠시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푸스스 웃음을 보였다. 옆에서 보이는 그의 빨개진 귀가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코우.”
“네?”
“나도 하지 못한 말이 있어.”
“으음, 진짜요?”
코우는 쿠니키다가 해줄 말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으음, 예쁘다던가, 예쁘다던가!
그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내신 뒤, 하려던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오늘 사실 널 제대로 보지 못했어.”
“아까부터 실컷 봤잖아요!”
“그래, 그렇긴 한데.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
“…왜요?”
코우는 몸을 돌려 쿠니키다를 똑바로 바라보았고, 쿠니키다는 잠시 생각하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가, 코우를 따라 몸을 돌려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5초 정도 코우를 바라본 쿠니키다는, 이내 더는 바라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고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코우는 그런 그가 이상하다고 느끼며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러자 보이는 건.
“앗.”
그의 붉어진 얼굴이었다. 코우는 그의 반응에 어쩐지 자신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황급히 얼굴을 멀리하고는 부채질을 했다.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아니, 이전에도 살짝 보긴 했으나 그때마다 쿠니키다가 도망치듯 밖을 나서는 바람에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쿠니키다는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평소와 다름없이 얘기하려고 애쓰는 듯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오늘,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다. 뭐, 항상… 항상 그랬었지만.”
“고, 고마워요…!”
“응. 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중요한 얘기는 따로 있었는데.”
쿠니키다는 놓았던 코우의 손을 다시 한 번 꼭 잡고는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는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녀를 피하지 않고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코우는 그와 마주하고 있는 자신의 시선이 긴장한 덕에 살짝 떨리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었지만.”
“…네.”
“코우, 넌 내 이상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한 시간 동안 애써 진정시켰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이상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만큼 이런 말을 쉬이 꺼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역시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줄곧 추구했던 이상. 완벽함. 수많은 계획. 그 모든 것들을 다 제치고 그의 이상은 그녀 자체가 된 것이었다.
“…돗포, 씨.”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한 말도 아니야. 최근에 깨달았을 뿐이었어.”
“응, 알아… 알아요.”
“완벽한 것도, 오차 없는 계획들도. 물론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 하지만, 그건 내 이상이 아니었다. 수첩 속 내가 바라던 이상형은 더더욱 이상이 아니었지.”
코우는 수첩 속 이상형 얘기가 나오자, 우는 와중에도 작게 웃었다. 엄청난 이상형이었지. 좌절한 적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보는 재미는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이상형 내용이 담겨있던 내용이 사라졌었다. 마치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그녀는 그제야 이 이유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아까도 할머님이 말씀하시더군. 내가 너로 인해 많이 강해지고, 또 변한 것 같다고. 맞는 말씀이야. 너로 인해 변화했어. 조금 더, 이상적인 형태로 말이지.”
“응.”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 이상이지만, 꼭 이상이 완전하다는 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걸 네 덕분에 깨달았어. 완벽하지 않아도, 그 속에 이상이 담겨있을 수 있다는 걸. 완벽해지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쿠니키다는 천천히,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그녀에게 자신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울고 있는 코우의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코우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확신했지. 내 이상은 너라는 걸. 앞으로 널 좇기 위해 수없이 애쓸 거야. 같아지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비슷해질 수 있도록. 그게 지금 나의 새로운 목표다.”
“많이, 힘들 텐데요.”
역시 넌 이 와중에도.
울먹이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코우의 모습에 진지했던 그의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크게 활짝 웃고 있는 그의 웃음만이 얼굴에 담겨있었다.
“힘들겠지. 어떻게 너를 따라가겠어. 그러니까 이상인 거지.”
“그럼… 그럼 저도, 돗포 씨를 내 이상으로 삼을래요. 앞으로 조금 똑 부러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코우는 어느새 눈물을 멈추고는 코를 훌쩍이며 쿠니키다의 말에 대꾸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더 꽉 잡았고, 그 역시 그녀를 따라 손을 꼭 붙잡았다.
“어떤 면에서?”
“돈 관리요! 돈 관리를 잘하면, 계획적으로 디저트를 사 먹을 수 있겠죠?”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뭐가 어때서요! 가능하지 않을까요!”
“글쎄.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만.”
“뭐에요, 그 애매한 대답은!”
코우는 분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쿠니키다는 그런 코우를 향한 미소를 이제는 숨기지 않고 보여주었다.
마침 두 사람 앞에 닫혀있던 간이 문이 적절한 때에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둘은 동시에 꼭 잡고 있는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손 놓지 않을 준비, 된 거죠?”
“당연한 말을.”
새하얀 문이 열림과 동시에 살랑거리는 바람이 두 사람 앞에 불어왔고, 그들을 축복하는 듯한 벚꽃잎들은 그들의 앞길을 따라 춤추기 시작했다.
더없이 따스한 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