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iNAE
- 이케부쿠로 디비전, 야마다 가(家) 현관.
“이치형, 어디 가세요?”
오후 1시를 조금 넘은 시각. 이치형이 드물게도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현관에서 구두를 꺼내 신기에, 배웅하면서 목적지를 묻는다. 이치형은 자주 신지 않아 조금 꽉 끼는 구두에 발을 조심히 욱여넣으며 대답해주신다.
“아아, 지인의 결혼식이야.”
“결혼식…”
그렇구나. 충분히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두를 마저 갈아 신은 이치형이 일어서자, 안 그래도 장신인 키가 더욱 돋보인다. 다녀올게,라는 말과 함께 이치형이 현관문에 손을 얹는 순간, 지로의 방에서 우당탕하고 커다란 소음이 일어난다. 어차피 낮잠이라도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진 거겠지. 한심해서 그만 한숨이 푹푹 나온다. 이치형도 그렇게 짐작했는지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이신다.
“으, 음… 어쨌든. 난 오늘 저녁까지 먹고 올 것 같으니까. 너희끼리 챙겨 먹을 수 있지? 그럼,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침대에서 떨어졌는데도 속 편히 잠을 자는 저능을 손 털듯 가볍게 무시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며 현관을 나서는 이치형을 배웅한다. 문이 닫히자, 짧게 한숨을 쉰다. 점심은 아까 이치형이 차려준 카레로 배를 채웠다. 우리 집은 기본 식사는 당번제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 당일의 저녁 당번은 나. 실은 아까부터 냉장고를 열어가며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있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메뉴가 없다. 지로에게 리퀘스트라도 받는다면 조금은 편해지겠지만, 보시다시피 낮잠 삼매경이다. 제 꼬리를 쫓는 고양이 마냥 주방을 이리저리 배회하듯 서성거리고 있자니, 되려 생각날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오늘 중에만 4번째로 냉장고 문을 연다. 안에는 감자, 당근, 양파, 가지 같은 기본적인 야채와 식재료가 조금. 문짝에는 우유, 생크림, 계란, 간장 같은 유제품과 조미료가 들어있다. 육류칸에는 카레에 쓰고 남은 목살이 조금.
“…어? 이건…”
문득 냉장고 안쪽에 아까는 보지 못했던 자그마한 흰 사각형의 박스를 발견한다. 꺼내보면 겉면에 영문 필기체로 제과점의 로고가 박혀있어, 열어보면 흰 생크림 위에 딸기가 얹힌 쇼트케이크 한 조각이 들어있다. 이건 분명히.
“시노부가 준거였지.”
미하루 시노부. 간단히 말해 내 연인이다. 이틀 전, 유명한 케이크 가게에서 샀지만 혼자서는 다 먹을 수가 없다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나누어준 조각 케이크다. 선물을 받아든 순간 기뻐하는 시노부의 표정과 나를 생각해준 성의에 감사하며 받아놓았지만, 그날 후식으로 먹는다고 냉장고 안쪽에 넣어둔 것을 깜빡 잊은 모양이다. 이틀이 지났지만 아직 먹을 수 있으려나. 기껏 시노부가 준 케이크라고 하는데. 그걸 먹을 수 없다니 슬픈 일이다. 안타까움에 가슴을 치며 후회할 것이다. …표현이 조금 과장이려나. 찬장에서 포크와 접시를 꺼내 케이크가 뭉개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옮긴다. 섬세하게 잘린 케이크 조각 앞부분을 포크로 잘라 입안에 떠 넣는다. 폭신한 스폰지와 생크림에 섞인 잘게 다진 딸기 조각이 입안을 맴돈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상큼한 단맛에 시노부를 떠올린다. 생크림 위에 얹힌 붉은 딸기를 보며 이치형을 떠올린다. 결혼식이라, 버진 로드, 웨딩드레스, 웨딩 케이크. 본 적도 없을 터인 결혼식의 풍경이 시야에 흐릿하게 겹친다. 오직 내 머릿속에 지식으로서 존재하는 이미지가 만들어낸 결혼식장에서. 흰 꽃이 깔린 버진 로드를 나아가며, 아마 그 끝에 서있을 시노부를 상상한다.
결혼.
결혼식.
연인들의 사랑의 서약.
나와 시노부가?
“…너무 이른가.”
그런 말을 남몰래 중얼거리며 한 조각을 더 입에 떠 넣었다. 층층이 쌓인 스폰지와 크림이 입안에서 눈처럼 녹는다. 자취를 금방 감추어버리는 달콤함에 아쉬워할 겨를도 없이, 문득 생크림의 물결이 웨딩 베일의 그것과 닮았다고 생각해버리는 나에게, 동경인지 미련인지 모를 감정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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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코하마 디비전, 야마시타 공원.
“또 만나잖냐. 시노부였나?”
“…야쿠자 씨.”
일주일 만의 요코하마 야마시타 공원. 해가 지고 밤이 찾아들 때가 돼서야 미나토미라이의 야경에 빛이 들어온다. 멍하니 바다 너머로 반짝이며 흔들리는 불빛에 시선을 두고 있자니,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오히츠기 사마토키. 요코하마 디비전의 대표이자 야쿠자라고 하는 사람이다. 나는 통칭 야쿠자 씨라고 부르고 있다. 이유는 그야, 야쿠자니까. 그 외의 이유가 더 있을까. 이케부쿠로 출신인 내가 요코하마에 비정기적으로 출석을 하는 이유나, 입만 열면 폭언을 쏟어낸다는 야쿠자와 친한 이유에 대해 묻고 싶겠지만. 그건 나중에.
“그 차림은 뭐야. 어디 갔다 왔어?”
“어이, 존대를 써라. …결혼식이야.”
그렇구나. 야쿠자 씨의 디폴트 패션은 해골이 프린트된 하와이안 셔츠에 검은 스키니, 그리고 워커다. 무척이나 야쿠자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스타일이다. 그런 야쿠자 씨가 평소와는 달리 쫙 빼입은 검은 정장에, 그럼에도 답답한지 넥타이와 목 근처의 셔츠 단추 몇 개를 러프하게 풀어헤치고 있다. 은백색의 머리의 반쪽은 위로 넘겨 단정하면서도 스타일리시 하다. 역시 외모도 한몫하는구나. 그나저나.
“결혼 축하해. 누구랑 했어?”
“…내가 한 게 아냐. 지인의 결혼식이다.”
“농담이야.”
그런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전 더티독에다 현 요코하마 대표의 결혼이다. 당연히 식을 올리기도 전에 중왕구와 매스컴이 먹잇감을 찾은 맹수의 눈을 하고 달려들 것이 틀림없을 테니까. 결혼식이라. 야쿠자와 결혼식. 안 어울리네. 턱시도라면 어울릴지도 모르겠지만.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와 결혼. 흠. 수술대 위의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같이 필시 뜻이 이어지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다. 그걸 말하자면, 스스로와도 어울린다는 주장을 할 생각은 없지만. 찰칵, 라이터가 켜지는 소리가 들린다. 흰 담배 끝자락이 붉게 타들어간다. 언제나 언짢아 보이는 것이 이 사람의 특징이지만 오늘따라 더욱이 안 좋아 보임을 느낀다. 결혼식이라는 경사에 갔다 온 사람임을 감안해서도.
“기분 안 좋아 보이네.”
“…아아. 그 식장에서 망할 위선자를 봤다고.”
야쿠자 씨가 담배를 쥐지 않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굳게 주먹 쥐며 분노를 감출 필요도 없다는 듯이 여실히 드러낸다. 그가 말하는 위선자는 이케부쿠로의 야마다 이치로임을 나는 알고 있다.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와 야마다 이치로는 견원지간. 적어도 더티독의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굳이 본인에게 상기시킬 필요도 없으니, 그래. 하고 조용히 대답한다. 괜히 이 사람의 상처일지도 모르는 부분을 자극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잠자는 늑대의 심기를 굳이 건드려서 득 볼 것이 도대체 어디 있을까. 언제부턴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야쿠자 씨가 말없이 내뱉는 회색 담배연기 사이로 미나토미라이의 야경이 비친다. 독한 연기 탓에 눈이 매웠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는다. 아마도, 바닷바람이 섞인 탓일까.
“결혼식은 어땠어.”
“…그냥 그랬어. 별거 없어.”
의미 없이 던진 질문에 의미 없는 대답을 해준다. 손에 꼽을 정도로 영양가 없는 5초라서 그만 헛웃음이 나올 뻔 한걸 애써 참는다. 야쿠자 씨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한쪽 입꼬리만을 올리고 허탈하게 웃는다. 이래서야 의존할 건 내 상상력 뿐이잖아. 기껏해야 흰 식장에서, 또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비치는 교회에서, 수많은 하객들, 그 사이를 걷는 두 사람. 턱시도와 웨딩드레스. 그리고 맹세와 키스. 지독히도 단편적인 단어들만이 모여 그려낸 그림은 한없이 단순하기 짝이 없다. 이런 것으로 무엇을 알 수 있는 걸까. 내가 그들의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역시, 내가 그림 안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결코 그려내지 못하는 걸까.
“너 같은 꼬맹이는 아직 먼 세계니까.”
야쿠자 씨가 입을 열어 문득 그렇게 말한다. 어쩐지 아득하게 들리는 목소리에게, 알고 있어.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14살에게 결혼식은 이르잖아. 현실로 잠시 돌아가자면 법적으로 불가능. 알고 있다고. 그래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먼 세계라도, 언젠가는 닿을지도 모르잖아. 건방진 14살에, 입이 험하고, 성격 나쁘고, 그럼에도 나를 좋아해 주는 그 애하고 나라도, 언젠가는. 그런 가능성을 마음 한구석에 고이 품고 있었기에, 구태여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나 자신의 머리를 살짝 건드린다. 처음부터 그곳에 없을 터인 웨딩 베일은 손끝에서 천천히 자취를 감춘다.